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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난 조선의 왕. 광해

by 버터스러움 2024. 2. 13.

광해

 

 

축복받지 못하며 세자가 되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조선 14대왕 선조의 뜻과 달리 세자가 되었던 광해군은 그의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안좋았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조는 정실 부인과 아이를 갖지 못했고, 광해군의 친형은 왕이 될 자질이 없었기 때문에, 광해군을 대신하여 후궁 출신인 신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신성군은 전쟁 중에 병에 걸려 피난길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전쟁 중에 백성들을 지휘할 지도자가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했습니다.

 

계속되는 아버지와의 반목

 임진왜란 동안, 광해군은 평양성을 지키며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직접 전쟁 지역으로 들어가 군수품을 확보하고, 일본군이 침입한 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라에서 보낸 식량과 군수품이 각 지역으로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지휘관들을 감시하고 독려했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인해 백성들은 광해군을 지지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을 의심했고, 질투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에도 광해군은 많은 공을 세우지만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왕이 되다

 1618년, 선조의 사망 후 마침내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위에 오르면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통치는 조선의 역사적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1. 정치적 탄압과 왕권 강화

 광해군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의 권한을 확대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이는 양반층과 사대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의 결정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 대동법

 광해군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조세 개혁의 일환으로,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지방 관리 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양반층의 반대로 인해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대동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 세율의 평준화: 대동법은 기존에 존재하던 채세제(賦課制)를 폐지하고 세율을 평준화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이전에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세율이 적용되어 있었으나, 대동법 시행 후에는 전체적으로 세율이 통일되었습니다.

 

2-2. 세무의 간소화: 대동법은 세무 체계를 단순화하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무 감사를 강화하고, 잘못된 과세나 부정 행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시행함으로써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2-3. 조세 부담의 경감: 대동법은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포함했습니다. 세율의 평준화와 세무의 간소화를 통해 조세 체계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2-4. 군역을 제도화: 대동법은 백성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군역을 제도화하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이를 통해 전쟁이나 비상시에 군대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3. 외교 정책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추구하여 조선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중국과 후금과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에 군사를 파병하는 등의 외교적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그의 폐위로 이어졌습니다.

 

4. 경제적 정책

 광해군은 경제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상업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세금 제도 개혁을 추진하여 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광해군의 정책은 다양한 영역에서 시행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양반층과 사대부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폐위 되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제주도로 다시 옮겨져 격리되고, 6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시작하여 왕으로써의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5년 여만에 폐위된 후 마침내 유배지에서 비운의 삶을 끝냈습니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들어선 인조 정권은 광해군과는 달리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채택했고, 이로 인해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에 휘말려 전 국토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광해군의 폐위 이후의 역사적 사실이, 그의 중립외교가 얼마나 현명한 결정이었는지를 명확히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