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아버지와 형제들과는 다르게 무예보다 학문을 좋아했고, 이성계 아들 중, 홀로 문관 과거시험에 합격 하였습니다. 조선 건국에 있어 그의 역할은 이성계의 어느 충신들 못지 않게 중요했습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도와 전장터에 있었지만, 이방원은 개경에 가족들을 목숨을 걸고 구해내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습니다. 가족이 포로로 잡힐 수 있는 중요한 상황에서 당시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가족들 개경 탈출 이라는 중차대한 입무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는 둘의 신뢰는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이후,정치적인 결단에서 이방원과 이성계의 신뢰가 깨지게 됩니다. 이방원은 아버지가 아끼는 포은 정몽주를 살해 함으로써, 정치적인 위기에 빠졌던 이성계 당여들과 및 그의 가족들을 구해냈습니다. 이로인해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간의 관계가 깨지게 되지만, 이방원의 단호한 결단이 없었으면 이후의 조선 건국 과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정몽주 일파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왕자의 난
조건 초기 왕자의 난은 조선 건국 이후, 왕위 걔승 여부로 인한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발생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의 소실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은, 왕권 다툼을 넘어 각자 세력을 옹호 하는 두 세력 간의 분쟁을 초래 하였습니다. 이는 이성계 정실 부인의 아들이 5명이나 있었지만, 후실 소생의 아이를 세자로 삼아, 자신이 추구하는 조선을 만들고 싪어하는 정도전의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왕권주의를 내새우는 이방원과 이런 정도전과의 첨예한 대립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신덕왕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 되고, 정도전 일팍가 사병을 혁파하며 이방원의 5형제와 그의 세력들을 견재하려고 하자, 이방원은 하륜, 이숙번, 조영무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고, 정도전 일파와 세자 이방석을 살해합니다. 이후 이성계가 왕위를 내려오고, 이성계의 둘째 형인 정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이방원 일당은 조선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성계와의 대립
조사의의 난은 1402년, 함경도 동북면에서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을 말합니다. 이 반란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로, 세자 이방석이 희생되자,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였던 조사의가 죽은 세자 이방석과 신덕와후의 복수를 하겠다며 일으킨 난 입니다. 하지만 조사의란 존재가 동북면의 세력을 귀합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자의 난 이후로 이방원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이성계가 조사의의 배후에서 난을 진두 지휘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 동북면 전역이 수장들이 대부분 조사의의 측에 동참하였고,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여진족도 난에 가담했습니다. 조사의 측은 초기에는 관군과의 전쟁에서 여러번 승리하였지만, 이내 합류한 이방원의 본군에 패하면서 반란은 진압되게 됩니다.
숙청의 군주
왕자의 난 이후 여러 소요 사태들이 정리되고 점차 시국이 안정이 되자, 이방원은 정종에게 왕위를 이어받고,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3대 국왕 태종으로 등극합니다. 태종은 즉위하고 그가 그토록 추구하던 왕권 강화를 위해, 자산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돕던 공신들을 숙청 합니다. 왕자의 난의 시발점이 됬던 사병 혁파를 진행하였고, 건국 과정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중책을 맡으며 권력이 커져버린 공신들을 숙청합니다.
이방원은 과거에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외척이라는 세력들에 대한 증오심이 특히 대단했습니다. 그런 결과로, 왕후의 가문인 민씨 가문에 대한 숙청 또한 철저히 진행하였습니다. 민씨 가문은 이방원이 왕이 되는대에 그야말로 최대 공신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은 중전의 형제인 민무구, 민무질을 포함, 민씨 가문의 네 명의 아들을 죽이는 냉혹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의 외척에 대한 증오심은 계속 이어져, 이후 왕이 되는 세종 왕후 집안도 억울한 누명을 씌어 축출해 버립니다.
조선의 전성기를 만들다
태종의 공신, 외척 할것 없는 철저하고 냉혹한 숙청으로 인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고, 세종 때에는 권신들이 사라진 젊고 유능한 관리들로 조정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이런 관리들과 세종은 마음껏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고, 이방원이 원했던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과 화려한 문치의 시기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종 때에 이르러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이 다져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종 이방원은, 1422년 56세에 조선만을 위해 사라왔던 삶을 드디어 마감했습니다.